맨위로가기

마리아노 아리스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마리아노 아리스타는 스페인 군 장교 출신으로, 멕시코 독립 전쟁과 텍사스 혁명, 멕시코-미국 전쟁에 참전한 멕시코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1851년 멕시코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재정 문제와 잦은 반란으로 인해 1853년 사임했다. 이후 망명 생활을 하다 1855년 사망했으며, 1880년 멕시코로 유해가 송환되어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멕시코의 군인 - 아카마피치틀리
    아카마피치틀리는 14세기 후반 테노치티틀란의 첫 번째 통치자로서, 도시 발전에 기여하고 아즈텍 최초의 법률 제정에 관여했으며, 동맹과 조공 정책으로 테노치티틀란의 안정적인 성장을 이끌었다.
  • 멕시코의 군인 - 테쿤 우만
    테쿤 우만은 16세기 스페인 군에 맞서 싸운 키체족 전사이자 과테말라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역사적 실존 여부에 대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과테말라 독립의 상징으로 기려지고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되고 있다.
  • 멕시코-미국 전쟁 - 멕시코 할양지
    멕시코 할양지는 1848년 미국-멕시코 전쟁 결과로 멕시코가 미국에 할양한, 현재 미국 서부 여러 주의 일부를 포함하는 멕시코 전체 면적의 약 1/3에 달하는 광대한 영토를 의미하며, 이는 미국의 서부 진출에 기여했으나 멕시코의 국토 손실과 미국 내 노예제 갈등을 심화시켰다.
  • 멕시코-미국 전쟁 -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은 1848년 미국과 멕시코 간에 체결되어 미-멕시코 전쟁을 종식시키고 멕시코가 현재 미국 서남부의 광대한 영토를 미국에 할양하는 대신 미국이 멕시코에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규정했으나, 멕시코에는 치욕으로, 미국에는 영토 확장으로 평가되며 양국 관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 멕시코의 멕시코-미국 전쟁 참전 군인 - 호세 데 우레아
    호세 데 우레아는 멕시코 군인으로, 멕시코 독립 전쟁, 텍사스 혁명, 멕시코-미국 전쟁 등 19세기 멕시코의 주요 분쟁에 참여했으며, 특히 텍사스 혁명 당시 멕시코군 지휘관으로서 활약했지만 '골리아드 학살'과 관련되어 논란이 되었고, 산타 안나에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한 후 멕시코-미국 전쟁에 참전하여 콜레라로 사망했다.
  • 멕시코의 멕시코-미국 전쟁 참전 군인 - 마르틴 페르펙토 데 코스
    마르틴 페르펙토 데 코스는 1830년대 텍사스 혁명 당시 멕시코군을 지휘하며 텍사스 지역 반란 진압에 나섰던 멕시코 육군 장군이다.
마리아노 아리스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851년 에두아르 팽그레가 그린 초상화
이름마리아노 아리스타
원어 이름Mariano Arista
출생일1802년 7월 26일
출생지누에바에스파냐, 산루이스포토시 주, 산루이스포토시
사망일1855년 8월 7일
사망지포르투갈, 리스본
안장지돌로레스 묘지
배우자과달루페 마르텔
정당자유당
직위
임기 시작1851년 1월 15일
임기 종료1853년 1월 6일
이전 대통령호세 호아킨 데 에레라
다음 대통령후안 바우티스타 세바요스
임기 시작1848년 6월 12일
임기 종료1851년 1월 14일
대통령호세 호아킨 데 에레라
이전 장관마누엘 마리아 데 산도발
다음 장관마누엘 로블레스 페수엘라

2.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아리스타는 최고집행권 과도정부 시절, 정부에 반기를 든 반란에 맞서 싸웠다. 1824년 6월, 아팜 근처 코아만싱고 농장 부근 전투에서 비센테 고메스의 당파와 여러 게릴라 지도자들과 충돌한 후 그를 처형했다. 이 공로로 집행권은 그를 실질적 대위로 승진시켰다.

5년 후, 아리스타는 실질적 중령으로 승진했다. 그는 마누엘 고메스 페드라사의 선출에 반대하는 반란에 참여하여 산타 안나와 페로테에서 선언했고,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 장군이 할라파에서 비센테 게레로 대통령에 맞서 일어섰을 때, 푸에블라로 진군하여 할라파 계획에 반대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기병 400명을 파견, 4,000명의 민병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점령했다. 부스타만테 대통령의 총애를 얻어 1831년 2월 12일 실질적 대령으로, 같은 해 8월에는 정부가 모든 스페인인을 추방한 법을 무효화하는 것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준장으로 승진했다.

1832년 4월, 인클란 장군의 지휘하에 부스타만테 정부에 대한 반란과 싸웠고, 베라크루스 계획의 일환으로 레르마에서 일어난 세력을 물리쳤다. 산타 마리아 델 몬테에 있는 요새화된 곤잘레스 대령의 진지를 점령하는 데 실패한 후, 협상을 통해 그를 정부 지지로 되돌리고 톨루카 계곡 전체를 평정했다.

부스타만테 대통령이 직접 반군에 대항하여 군대를 이끌기 시작하자, 아리스타는 케레타로로 가는 길에 그와 합류했다. 여기서 아리스타는 대통령과 헤어져 모렐리아에서 돌아와 군의 주력 부대에 합류하여 갈리네로 전투에서 싸웠고, 승리 후 사카테카스에서 2리그 이내로 진격한 후 수도를 지원하기 위해 돌아왔다. 카사스 블랑카스에서 싸웠지만, 이 시점에서 반군이 승리했고, 아리스타는 휴전을 조정하고 사발레타 협약에 서명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이 협약은 1828년 처음 승리했던 임기의 마지막 몇 달을 이어받기 위해 망명에서 돌아온 마누엘 고메스 페드라사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와 산타 안나가 자유당 공천으로 부통령과 대통령직을 각각 차지했을 때, 고메스 페드라사는 베라크루스로의 수송 안전을 담당하고, 그 후 멕시코 주의 총사령관직을 맡는 등 군에서 계속 복무했다. 1833년 6월, 산타 안나가 지휘하는 작전 여단의 2인자로 임명되어 산타 안나를 독재자로 선포하고 반교회적 조치와 군 특권에 대한 조치로 고메스 파리아스를 축출하려는 반군과 싸우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아리스타는 반군에 합류했다. 아리스타는 고메스 파리아스에 대항하기 위해 수도에 특파원을 파견했다. 정부의 보복 대상이 된 아리스타는 과나후아토로 도망쳐 목숨을 보존한다는 약속 하에 항복하고 추방되었다. 11월 베라크루스를 떠나 미국으로 갔고, 1834년 쿠에르나바카 계획이 고메스 파리아스를 전복시킨 후 돌아왔다.[2]

멕시코 제1공화국이 중앙집권공화국으로 변모하는 과정에 있을때, 아리스타는 1835년 6월 초 베라크루스에 도착했지만, 처음에는 체포되었으나 나중에 수도로 가는 것을 허락받았다. 할라파에서 잠시 멈췄다가 산 후안 데 울루아에서 반란에 가담했다는 의심으로 베라크루스로 돌아왔지만 무죄를 선고받았다. 새 정부는 그를 최고군사재판소에 임명했고, 나중에는 군사·민사법전 합동위원회의 일원이 되어 민병대 감찰관으로 임명되었다.[2]

아리스타가 여러 군사직을 수행하고 있을 때, 1838년 과자 전쟁이 발발했고,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 정부는 아리스타에게 베라크루스 방어 임무를 맡긴 여단을 지휘하도록 했다. 마누엘 린콘의 명령을 받았는데, 린콘은 아리스타의 여단이 파소 데 오베하스에 머물도록 명령했다. 프랑스군이 산 후안 데 울루아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산타 안나로부터 베라크루스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2월 4일 저녁 9시에 항구에 진입하여 1833년 이후로 보지 못했던 산타 안나를 만났다. 다음날 아침 그들이 머물던 집이 프랑스군에 공격을 받았다. 아리스타는 저항했지만 포로로 잡혔다. 1839년 1월 28일까지 프랑스 군함에서 전쟁포로로 남아 있었다.[2]

과자 전쟁이 끝난 후, 아리스타는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연방제를 재건하려는 여러 반란을 진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산 루이스에서 출발하여 탐피코에 요새를 구축한 반체제 인사들을 공격하는 여단을 지휘하도록 임명되었다. 신속하게 수도를 떠나 여단을 편성했고, 부스타만테 사령관의 직접 명령 하에, 호세 우레아가 지휘하는 연방군이 자리 잡고 있던 타마울리파스로 이동했다. 시우다드 빅토리아까지 그를 추격했고, 탐피코 근처에서 우레아의 군대를 항복시켰다.[2]

아리스타는 타마울리파스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839년 말에는 북부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몬테레이로 진군하여 군관구를 재편성하고 반란군과 싸워 그들을 몬테레이에서 몰아내고, 산타 리타 데 모렐로스 전투 후 코아우일라까지 추격했다. 이 전투에서 그는 반군을 완전히 격파했다. 탐피코로 돌아와 폭동을 막는 데 도움을 주었고, 나중에 마타모로스로 이동했다. 반란군이 진압되자, 텍사스 반군의 세력에 맞서 국가의 통합을 방어하는 데 기여할 군대를 재편성하는 데 집중했다. 그 후 5년 동안 적대적인 원주민 부족에 대한 원정과 텍사스에 맞선 전투에 참여했다. 이 기간 동안 이시드로 레이스와 아드리안 울을 포함한 다른 여러 장교들과 북부군 사령관 직책을 교대했다.[2]

이후 아리스타는 1846년 북부군에 임명되어 멕시코령 텍사스에서 미군 부대를 축출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경 분쟁은 1846년부터 1848년까지 발발한 멕시코-미국 전쟁에 불을 붙이게 되었다. 아리스타는 팔로 알토 전투와 레사카 드 라 팔마 전투 당시 멕시코군의 사령관이었다. 아리스타의 전략은 전투 연구자들에 의해 토론의 주제가 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용감했지만, 아리스타는 멕시코 자유파벌의 멤버였기 때문에, 그가 맡은 보수적인 참모진들의 천적이었다. 팔로 알토와 레사카 드 라 팔마 전투에서 아리스타는 참모진들의 정치적 내분으로 인해 힘을 쓰지 못했다.

레사카 드 라 팔마 전투에서 패전한 후 멕시코 정부는 아리스타를 소환하여 사령관직을 박탈했다. 그후, 팔로 알토와 레사카 드 라 팔마의 패배에 대한 사면을 받았지만, 전투에서 배제되어 나머지 전쟁을 지켜보게 된다.

2. 1. 초기 생애

아리스타는 1802년 7월 26일에 태어나, 1813년 푸에블라 주의 연대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했다. 그는 베라크루스 랜서와 멕시코 드라고온에 소속되어 있었다. 아리스타가 군에 입대했을 때 이미 멕시코 독립 전쟁이 발발했고, 처음에는 왕당파로 싸우며 두각을 나타내어 1818년 멕시코 드라고온 장교가 되었다. 1820년 9월 소위, 1821년 5월 중위로 진급했다. 같은 해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의 이구알라 계획에 합류하기로 결정하고, 1821년 6월 11일 나팔수 한 명, 장교 다섯 명, 멕시코 연대 소속 드라고온 20명, 여러 부대에서 모은 50명의 병력을 이끌고 삼보장군의 군대에 합류, 리베르타드 연대에 배속되었다.

1821년 7월 반란군의 푸에블라 포위 공격에 참여했다. 여러 드라고온을 이끌고 모든 공격을 격퇴해 온 쇼루라의 초소까지 진격하라는 명령을 수행했고, 소규모 부대로 산 하비에르 요새 근처까지 진입했다. 페드로 사라소아 준장의 지휘 아래 여러 원정에 참여했고, 멕시코 시티 최종 포위 공격 당시 제1사단의 일원으로서 능력을 발휘했다. 수도 함락 10일 후 대위로 임명되었고, 1821년 12월에는 중령으로 승진했다.

1823년 2월 에체바리 장군의 지휘하에 합류하여 제1 멕시코 제국에 반기를 든 그레나디어 연대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황제에게 합류하려는 병사들을 저지할 정도로 이 사건에 열정적이었다. 아리스타는 수도를 점령할 때까지 해방군을 따라다녔다.

2. 2. 멕시코 독립 전쟁 참전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의 혁명군에 참가하기 전, 아리스타는 스페인군의 사관이었다. 그는 1813년 푸에블라 주의 연대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하여 베라크루스 랜서와 멕시코 드라고온에 소속되어 있었다. 멕시코 독립 전쟁 발발 당시 왕당파로 활약하며 1818년 멕시코 드라고온 장교가 되었고, 1820년 9월 소위, 1821년 5월 중위로 진급했다.[1]

1821년, 아리스타는 이구알라 계획에 합류하기로 결심하고, 나팔수 1명, 장교 5명, 멕시코 연대 소속 드라고온 20명, 그리고 여러 부대에서 모은 병력 50명을 이끌고 삼보장군의 군대에 합류하여 리베르타드 연대에 배속되었다.[1]

같은 해 7월, 반란군의 푸에블라 포위 공격에 참여한 아리스타는 여러 드라고온을 이끌고 쇼루라 초소까지 진격하라는 명령을 수행했고, 소규모 부대로 산 하비에르 요새 근처까지 진입했다. 페드로 사라소아 준장 지휘 아래 여러 원정에 참여했고, 멕시코 시티 최종 포위 공격 당시 제1사단의 일원으로 활약하여 수도 함락 10일 후 대위, 1821년 12월에는 중령으로 승진했다.[1]

1823년 2월, 아리스타는 에체바리 장군 지휘하에 제1 멕시코 제국에 반기를 든 그레나디어 연대에 소속되어 황제에게 합류하려는 병사들을 저지하며 수도를 점령할 때까지 해방군을 따라다녔다.[1]

2. 3. 멕시코 제1공화국 시절

최고집행권 과도정부 시절, 아리스타는 정부에 반기를 든 반란에 맞서 싸웠다. 1824년 6월, 아팜 근처 코아만싱고 농장 부근 전투에 참전하여 비센테 고메스의 당파를 만나 여러 게릴라 지도자들과 충돌한 후 그를 처형했다. 이 공로로 집행권은 그를 실질적 대위로 승진시켰다.[1]

5년 후 그는 실질적 중령으로 승진했다. 그는 마누엘 고메스 페드라사의 선출에 반대하는 반란에 참여하여 산타 안나와 페로테에서 선언했고,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 장군이 할라파에서 비센테 게레로 대통령에 맞서 일어섰을 때, 아리스타는 푸에블라로 진군하여 할라파 계획에 반대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기병 400명을 파견했다. 그는 4,000명의 민병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점령했다. 그는 부스타만테 대통령의 총애를 얻어 1831년 2월 12일 실질적 대령으로, 같은 해 8월에는 정부가 모든 스페인인을 추방한 법을 무효화하는 것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준장으로 승진했다. 1832년 4월 인클란 장군의 지휘하에 부스타만테 정부에 대한 반란과 싸웠고, 베라크루스 계획의 일환으로 레르마에서 일어난 세력을 물리쳤다. 산타 마리아 델 몬테에 있는 요새화된 곤잘레스 대령의 진지를 점령하는 데 실패한 후, 그는 협상을 통해 그를 정부 지지로 되돌리고 톨루카 계곡 전체를 평정했다.[1]

부스타만테 대통령이 직접 반군에 대항하여 군대를 이끌기 시작하자, 아리스타는 케레타로로 가는 길에 그와 합류했다. 여기서 아리스타는 대통령과 헤어져 모렐리아에서 돌아와 군의 주력 부대에 합류하여 갈리네로 전투에서 싸웠고, 승리 후 사카테카스에서 2리그 이내로 진격한 후 수도를 지원하기 위해 돌아왔다. 그는 카사스 블랑카스에서 싸웠지만, 이 시점에서 반군이 승리했고, 아리스타는 휴전을 조정하고 사발레타 협약에 서명하라는 임무를 받았다.[1] 이 협약은 1828년 처음 승리했던 임기의 마지막 몇 달을 이어받기 위해 망명에서 돌아온 마누엘 고메스 페드라사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와 산타 안나가 자유당 공천으로 부통령과 대통령직을 각각 차지했을 때, 고메스 페드라사는 베라크루스로의 수송 안전을 담당하고, 그 후 멕시코 주의 총사령관직을 맡는 등 군에서 계속 복무했다. 1833년 6월, 그는 산타 안나가 지휘하는 작전 여단의 2인자로 임명되어 산타 안나를 독재자로 선포하고 반교회적 조치와 군 특권에 대한 조치로 고메스 파리아스를 축출하려는 반군과 싸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아리스타는 반군에 합류했다. 아리스타는 이제 고메스 파리아스에 대항하기 위해 수도에 특파원을 파견했다. 이제 정부의 보복 대상이 된 아리스타는 과나후아토로 도망쳐 목숨을 보존한다는 약속 하에 항복하고 추방되었다. 그는 11월 베라크루스를 떠나 미국으로 갔고, 1834년 승리한 쿠에르나바카 계획이 고메스 파리아스를 전복시킨 후 돌아왔다.[2]

3. 멕시코 중앙집권공화국 시절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의 혁명군에 참가했던 아리스타는 이후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휘하에서 1836년 텍사스 혁명 진압 임무를 수행했다.

1846년 아리스타는 북부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멕시코령 텍사스에서 미군 부대를 몰아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이 국경 분쟁은 결국 1846년부터 1848년까지 이어진 멕시코-미국 전쟁의 발발로 이어졌다. 아리스타는 이 전쟁에서 〈팔로 알토 전투〉와 〈레사카 드 라 팔마 전투〉에서 멕시코군을 지휘했다.

아리스타의 전략은 전투 연구자들 사이에서 자주 논쟁거리가 된다. 그는 개인적으로 용감했지만, 멕시코 자유파벌인 "republicano"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보수적인 참모들과 갈등을 겪었다. 팔로 알토와 레사카 드 라 팔마 전투에서 아리스타는 참모진과의 정치적 내분으로 인해 제대로 된 지휘를 하지 못했다.

레사카 드 라 팔마 전투에서 패배한 후, 멕시코 정부는 아리스타를 소환하고 사령관직을 박탈했다. 이후 아리스타는 팔로 알토와 레사카 드 라 팔마 전투 패배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났지만, 더 이상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고 남은 전쟁 기간 동안 관전해야 했다.

3. 1. 과자 전쟁 참전

멕시코 중앙집권공화국 시기, 1838년 과자 전쟁이 발발하자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 정부는 마리아노 아리스타에게 베라크루스 방어를 위한 여단 지휘를 맡겼다. 그는 마누엘 린콘의 명령에 따라 파소 데 오베하스에 주둔했다.[1]

프랑스군이 산 후안 데 울루아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산타 안나의 명령을 받아 베라크루스로 진격했다. 12월 4일 저녁 9시에 항구에 도착하여 산타 안나를 만났고, 다음날 아침 프랑스군의 공격을 받아 저항했지만 포로로 잡혔다. 이후 1839년 1월 28일까지 프랑스 군함에 전쟁포로로 억류되었다.[1]

3. 2. 연방주의 반란 진압

멕시코 제1공화국이 중앙집권공화국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 정부는 과자 전쟁이 발발하자 마리아노 아리스타에게 베라크루스 방어 임무를 맡겼다. 프랑스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후, 아리스타는 연방제를 재건하려는 여러 반란을 진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

그는 산 루이스에서 출발하여 탐피코(Tampico)에 요새를 구축한 반체제 인사들을 공격하는 여단을 지휘했다. 호세 우레아가 지휘하는 연방군이 자리 잡고 있던 타마울리파스(Tamaulipas)로 이동하여 시우다드 빅토리아까지 추격했고, 탐피코 근처에서 우레아의 군대를 항복시켰다.[1]

아리스타는 타마울리파스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839년 말에는 북부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몬테레이로 진군하여 군관구를 재편성하고 반란군과 싸워 그들을 몰아내고, 산타 리타 데 모렐로스 전투 후 코아우일라(Coahuila)까지 추격하여 반군을 완전히 격파했다. 그는 탐피코로 돌아와 폭동을 막는 데 도움을 주었고, 나중에 마타모로스(Matamoros)로 이동했다. 반란군이 진압되자, 그는 텍사스 반군의 세력에 맞서 국가의 통합을 방어하는 데 기여할 군대를 재편성하는 데 집중했다.[2]

3. 3. 텍사스 문제

아리스타는 1836년 텍사스 혁명 진압에 참여하였고, 멕시코의 독재자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휘하에 있었다.[1] 1839년 말에는 북부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텍사스 반군의 세력에 맞서 국가 통합을 위한 군대 재편성에 집중했다. 이후 5년 동안 적대적인 원주민 부족에 대한 원정과 텍사스와의 전투에 참여했다.

1846년 아리스타는 북부군에 임명되어 멕시코령 텍사스에서 미군 부대를 축출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경 분쟁은 1846년부터 1848년까지 벌어진 멕시코-미국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아리스타는 팔로 알토 전투와 레사카 드 라 팔마 전투에서 멕시코군 사령관을 맡았다.[1]

4. 멕시코-미국 전쟁 참전

1846년 아리스타는 북부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멕시코령 텍사스에서 미군 부대를 축출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이러한 국경 분쟁은 결국 1846년부터 1848년까지 벌어진 멕시코-미국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3] 미국과 멕시코 간의 긴장이 전쟁으로 치닫자 아리스타는 국경 방어를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고, 자신의 지휘하에 있는 부대를 6,000명으로 증강했다. 그는 마리아노 파레데스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지휘권에서 물러나 몬테레이 근처에 소유한 자신의 대농장으로 은퇴했다가, 1846년 4월 재커리 테일러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마타모로스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시 복귀했다.[3]

4. 1. 팔로 알토 전투와 레사카 데 라 팔마 전투

아리스타는 팔로 알토 전투레사카 데 라 팔마 전투 당시 멕시코군의 사령관이었다.[3]

아리스타의 전략은 전투 연구자들 사이에서 자주 토론되는 주제이다. 개인적으로는 용감했지만, 아리스타는 멕시코 자유파벌인 "republicano"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그가 지휘하는 보수적인 참모진들과는 상극이었다. 팔로 알토와 레사카 데 라 팔마 전투에서 아리스타는 참모진들의 정치적 내분으로 인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3]

레사카 데 라 팔마 전투에서 패배한 후, 멕시코 정부는 아리스타를 소환하여 사령관직을 박탈했다. 이후 아리스타는 팔로 알토와 레사카 데 라 팔마에서의 패배에 대한 혐의를 벗었지만, 전투에서 배제되어 나머지 전쟁을 지켜보게 되었다.[3]

4. 2. 전쟁 이후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의 혁명군에 참가했던 아리스타는 1836년 텍사스 혁명 진압에 참여하여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휘하에서 활동했다.[3]

1846년, 아리스타는 북부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멕시코령 텍사스에서 미군 부대를 몰아내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이 국경 분쟁은 1846년부터 1848년까지 이어진 멕시코-미국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아리스타는 팔로 알토 전투와 레사카 드 라 팔마 전투에서 멕시코군을 지휘했다.[3]

아리스타의 전략은 전투 연구자들 사이에서 자주 논의되는 주제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용감했지만, 멕시코 자유파(republicano)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보수적인 참모들과 갈등을 겪었다. 팔로 알토와 레사카 드 라 팔마 전투에서 아리스타는 참모진의 정치적 내분으로 인해 제대로 된 지휘를 하지 못했다.[3]

레사카 드 라 팔마 전투 패배 후, 멕시코 정부는 아리스타를 소환하여 사령관직을 박탈했다. 이후 아리스타는 팔로 알토와 레사카 드 라 팔마 전투 패배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났지만, 더 이상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남은 전쟁 기간을 관망했다.[3]

1851년, 아리스타는 호세 호아킨 데 에레라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하여 국가 재정 안정에 힘썼다. 그러나 보수파의 저항과 반란으로 인해 1853년 사임하고 추방당했다.[3]

1855년, 아리스타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사망했다. 1880년, 그의 유해는 멕시코로 돌아왔고, 진보 진영은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했다.[3]

5. 멕시코 대통령 재임 (1851-1853)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의 혁명군에 참가했던 아리스타는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휘하에서 1836년 텍사스 혁명 진압에 참여했다. 1846년에는 북부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텍사스에서 미군 부대를 축출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이는 1846년부터 1848년까지 벌어진 멕시코-미국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아리스타는 팔로 알토 전투레사카 데 라 팔마 전투에서 멕시코군을 지휘했다.

아리스타의 전략은 전투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는 용감했지만, 멕시코 자유파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보수적인 참모들과 갈등을 겪었다. 팔로 알토와 레사카 드 라 팔마 전투에서 아리스타는 참모진과의 정치적 내분으로 인해 제대로 된 지휘를 하지 못했다.

레사카 데 라 팔마 전투에서 패배한 후, 아리스타는 멕시코 정부에 의해 소환되어 사령관직을 박탈당했다. 이후 두 전투의 패배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났지만, 남은 전쟁 기간 동안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

1851년 아리스타는 호세 호아킨 데 에레라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하여 국가 재정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보수파의 저항과 그로 인한 반란으로 인해 1853년 사임하고 추방되었다.

아리스타는 1855년 포르투갈리스본에서 사망했다. 1880년 그의 유해는 멕시코로 돌아왔으며, 진보 계파는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여겼다.

5. 1. 대통령 당선

마리아노 아리스타 대통령 (1851-1853)


1851년 대통령 선거 운동은 1850년 하반기에 시작되었다. 에레라 행정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아리스타 전쟁장관은 전 대통령인 마누엘 고메스 페드라사,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 니콜라스 브라보, 산타 안나 등과 함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했다.[1]

야당은 아리스타가 멕시코시티 아윤타미엔토 선거 절차에 개입했다고 비난했지만, 결국 주들이 결정한 대통령 선거는 아리스타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그는 총 19표 중 13표를 얻었다. 다음으로 많은 표를 얻은 후보는 전 전쟁장관 후안 알몬테로 3표를 얻는 데 그쳤다.[2]

아리스타는 1851년 1월 15일에 취임하여 국립궁전 방문객을 위한 사소한 규정을 즉시 통과시키면서 조롱을 받았다. 그는 이미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던 에레라의 정책을 많이 채택하기로 결정했지만, 내각에 몇 가지 변화를 주었다. 마리아노 야녜스가 외교장관이 되었고, 호세 마리아 아기레가 사법장관이 되었으며, 마누엘 로블레스 페수엘라 장군이 전쟁장관이 되었다. 에레라의 재무장관 파이노는 자신의 자리를 유지했다.[3]

5. 2. 재정 문제

멕시코의 만성적인 재정 문제는 아리스타 정부에게 심각한 문제였다. 정부 수입은 800만 페소였지만 지출은 2600만 페소에 달했다. 지출을 1000만 페소로 줄이는 목표가 설정되었다. 재정을 개선하기 위해 아리스타는 공무원 급여를 획기적으로 삭감했는데, 경우에 따라 최대 75%까지 감축되었지만, 이러한 감축은 불균형적으로 이루어졌고 많은 불필요한 지출은 그대로 남았다. 재정부 장관 마누엘 파이뇨(Manuel Payno)는 재정 적자 감축에 대한 의견 차이로 사임했다.[1]

파이뇨의 후임자 4명도 한 달 만에 사임했고, 1851년 5월에 마누엘 피냐 이 쿠에바스|마누엘 피냐 이 쿠에바스es가 재정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적자를 충당하기 위해 경미한 세금 인상을 제안했지만, 각 주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고, 의회는 이 문제를 더 이상 다루지 않았다. 8월, 그는 주지사 회의를 소집하여 더 나은 해결책을 제시하도록 요청했다. 주지사들은 정부의 부실 관리를 비난하며 새로운 재정 계산을 제시했는데, 그 계산에 따르면 적자가 전혀 없었다. 이는 1849년 11월에 월 지출을 50만 페소로 제한하는 법령에 근거한 것이었다. 주지사들은 주 정부의 기여금을 70만 페소에서 100만 페소로 증액할 것을 제안했지만, 적자 해소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2]

정부는 새로운 재정 추산을 실행하기 위해 적대적인 의회로부터 추가적인 권한을 필요로 했는데, 이 추산이 유효하려면 추가적인 예산 삭감이 필요했다. 내각이 사임하고 페르난도 라미레스를 외교부 장관으로, 호세 우르바노 폰세카 마르티네스|호세 우르바노 폰세카 마르티네스es를 사법부 장관으로, 마르코스 에스파르자를 재정부 장관으로, 그리고 마누엘 로블레스 페수엘라(Manuel Robles Pezuela) 장군을 계속해서 전쟁부 장관으로 하는 새로운 내각이 구성되었다. 정부는 의회로부터 약간의 양보를 얻었지만, 의회는 대체로 무기력했고 언론의 비난을 받았다. 일부 신문들은 정부가 의회를 해산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체포되었다.[3]

연방 정부와 각 주 정부 간에는 재정 문제를 둘러싼 마찰이 있었다. 각 주가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안, 의회는 의원과 재무 관리들의 급여를 위해 관세의 8%를 부과하는 법령을 제정했다. 각 주는 또한 연방 채권과 그 의무를 소홀히 하고, 분담금 납부를 게을리 하는 등 연방 정부의 채무 이행을 느슨하게 지키고 있었다.

라미레스 장관은 밀수와 관세 위반을 불만으로 제기한 국내외 채권자들과 지불 문제에 대한 합의에 도달했다. 국내 채권자들은 모든 세관 임용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협회를 결성했다. 이 협회는 '후타 데 크레디토 푸블리코(junta de credito publico)'로 알려져 있으며, 세관에서 진행되는 상황을 감시할 대리인을 임명할 권리가 있었다. 1852년 5월 19일 법령에 따라 1850년 11월 국내 부채 통합 및 정산에 관한 조항을 이행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정부가 배정한 자금은 이자의 3분의 2 이상을 충당하기에 불충분했다.

한편, 정부의 예산 삭감은 순찰 서비스 감소와 저임금 공무원의 부패로 인해 범죄 급증으로 이어졌다. 정부가 부과한 높은 관세 때문에 북동부 국경 지역에서는 밀수가 만연했다. 지역을 보호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무용한 군대가 지역에 주둔하면서 연방 정부 정책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다.

5. 3. 잇따른 반란

마리아노 아리스타 대통령 당선 직후, 멕시코에서는 정부에 대한 반란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러나 1851년까지 정부는 산루이스포토시주, 베라크루스주, 틀락스칼라주할리스코주 일부 지역에서 일어난 폭동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1]

1851년 9월 18일, 북동부 주에서 호세 마리아 헤수스 카르바할은 높은 관세율에 항의하며 텍사스 용병 500명을 이끌고 멕시코 국경을 넘었다. 그는 추가로 200명의 병력을 확보하여 카마르고를 점령하고 마타모로스로 진군했다. 현지 책임자 아발로스는 관세 인하와 금지 조치 해제에 동의했지만, 이로 인해 멕시코 시장은 미국 상품으로 넘쳐났고 멕시코 제조업은 경쟁력을 잃게 되었다. 카르바할은 정부의 증원군 파견에도 불구하고 마타모로스를 계속 포위했지만, 현지 수비대의 저항과 정부 증원군 소식에 10월 30일 국경 너머로 도망쳤다. 1852년 2월, 카르바할은 다시 침입했지만 정부의 대비로 격퇴되었고, 정부는 이전 관세를 복원했다.[2]

계속되는 반란과 혁명 소문으로 정부는 더욱 신중해졌고, 많은 체포를 명령했으며, 언론의 정부 비판조차 금지했다. 이 제한 조치는 1852년 9월 21일에 발표되었으나, 10월 13일 대법원에서 위헌 판결을 받았다.[3]

1852년 중반, 후안 클리마코 레볼레도는 베라크루스에서 재정 정책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아리스타 정부는 주 당국에 협상을 지시했지만 거절당했다. 마사틀란에서는 주 분할을 둘러싼 봉기가, 미초아칸주에서는 멜코르 오캄포 주지사의 반교권적 조치 등에 반대하는 봉기가 발생했다.

할리스코주에서는 헤수스 로페스 포르티요 주지사가 과도한 정책 시스템 도입과 연방 정부의 꼭두각시라는 인식으로 인기를 잃었다. 그는 경찰관 폭행 혐의로 호세 마리아 블랑카르테를 체포하고 주 방위군에서 추방하면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1852년 7월 26일, 블랑카르테는 이에 반발하고 널리 퍼진 불만을 이용하여 자체 구성된 의회를 이끌고 주지사 관저를 점령했다. 의회는 그레고리아 다빌라를 새 주지사로 선포하고, 입법부 소집, 주 헌법 개정, 블랑카르테의 최고 군사 지휘권 유지 하에 개혁 도입을 요구했다. 포르티요는 충성스러운 군대를 이끌고 라고스로 후퇴하여 연방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연방 정부는 무장하지 않은 협상가만 파견했고, 그 사이 블랑카르테의 세력은 커져갔다.

산타 안나 지지자들인 산타니스타는 블랑카르테에게 접근하여 반란 규모 확대를 설득했다. 1852년 9월 13일, 블랑카르테는 아리스타 축출과 산타 안나의 정부 개편 참여를 선포했다. 다빌라는 쿠데타에 참여하지 않고 물러났으며, 산타니스타들은 그를 야네스 장군으로 대체했다. 일주일 후, 수정된 계획은 호세 L. 우라가 장군의 지휘 아래 놓였다. 그는 각 주 대표 2명으로 구성된 의회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고, 연방 기반 헌법 개정, 재정 및 선거 제도 개혁, 군대 재편성, 인디언 습격에 대한 국경 방어 개혁 임무를 맡았다. 우라가가 지도자로 선택되자 정부는 그를 과달라하라에서 멀리 옮기려 했으나, 우라가는 사임하고 혁명가들에 합류했다.

1852년 말, 내각 사임 물결로 마리아노 야네스가 외교 장관, J.M. 아기레가 사법 장관, 기예르모 프리에토가 재무 장관, 전 대통령 페드로 마리아 아나야가 전쟁 장관이 되었다. 블랑카르테 반란이 거세지자, 300만 페소 대출, 추가 세금, 행정부 특별 권한 등 추가 지원 요청을 위한 의회 임시회가 소집되었다. 반란 진압을 위한 소액 지원이 확보되었지만, 의회는 연방 정부에 부분적인 충성심을 보이는 주지사가 절반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불안해했다. 1852년 12월 16일, 프리에토 장관은 하원에서 열정적인 호소를 했다.

연방 정부는 대부분의 국가로부터 지지를 잃었다. 북동부에서는 카르바할이 또 다른 침략을 시도했고, 소노라에서는 프랑스 모험가 라우세 드 불봉 백작이 침략을 시작했다. 12월, 전략적 항구를 가진 탐피코와 베라크루스 주가 할리스코 계획에 동참했다.

1852년 12월 15일, 과달라하라에서 정부군이 패배한 후, 아리스타는 새해 의회 연설을 하고 1853년 1월 5일 사임했다. 같은 날 자정, 후안 바우티스타 세바요스가 국립궁전으로 소환되어 행정부 권한 이양을 통보받았다. 아리스타는 새벽 30분에 궁전을 떠나며 외교 장관 아로요에게 공식 사임서를 의회에 제출하도록 했다. 그는 제5여단 소속 기병 50명의 호위를 받으며 자신의 재산인 나나캄필파 농장으로 향했다. 그는 "대통령직과 그 책임은 합당한 권력과 존중이 수반되지 않으면 무거운 짐일 뿐이며 무의미한 직함이다"라고 말했다.

5. 4. 사임

1852년 말, 할리스코 계획에 대한 지지가 확산되고, 정부군이 과달라하라에서 패퇴하는 등 상황이 악화되자, 아리스타는 1853년 1월 5일 의회에 사임서를 제출했다. 그는 "이 직책[대통령직]과 그 책임은 그것에 합당한 권력과 존중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무거운 짐일 뿐이며 무의미한 직함이다"라고 말했다.

6. 사임 이후 및 사망

레사카 데 라 팔마 전투에서 패전한 후 멕시코 정부는 아리스타를 소환하여 사령관직을 박탈했다. 이후 팔로 알토와 레사카 드 라 팔마에서의 패배에 대한 사면을 받았지만, 전투에서 배제되어 나머지 전쟁을 지켜보게 되었다.

1851년 아리스타는 호세 호아킨 데 에레라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어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아리스타 정권에 대한 보수파의 저항과 그들에 의한 마지막 반란은 1853년에 그를 사퇴와 추방으로 이끌었다.

산타 안나가 다시 권력을 잡자 아리스타는 국외로 추방되었다. 건강이 좋지 않던 그는 여러 유럽 도시들을 방문한 후 세비야에 정착했지만, 건강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멕시코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그는 리스본으로 가는 배에 탑승했지만, 건강이 악화되자 의료 지원을 받기 위해 파리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1855년 8월 7일 저녁 10시 30분 타구스 증기선에서 사망했다.

그는 리스본의 산 후안 묘지에 묻혔고, 장례식에는 영국, 미국, 멕시코를 포함한 리스본 외교단의 구성원들이 참석했다. 이후 자유주의 대통령 이그나시오 코몬포르트가 집권하자 아리스타에게 명예를 부여하고 그의 유해를 멕시코로 옮겨 다른 대통령들과 함께 매장하도록 명령했다. 1880년 아리스타의 시신은 멕시코로 돌아왔으며, 진보 계파들은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여겼다.

1855년 사망 전 마리아노 아리스타의 사진

6. 1. 사후 평가

아리스타는 원래 스페인군의 사관이었으나, 이후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의 혁명군에 참가했다. 1836년 텍사스 혁명을 진압하는 동안 멕시코의 독재자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휘하에 있기도 했다.

아리스타의 전략은 전투 연구자들 사이에서 자주 논의되는 주제이다. 개인적으로 용감했지만, 아리스타는 멕시코 자유파벌인 "republicano"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보수적인 참모진들과는 상극이었다. 〈팔로 알토 전투〉와 〈레사카 데 라 팔마 전투〉에서 아리스타는 참모진들의 정치적 내분으로 인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레사카 데 라 팔마 전투에서 패배한 후 멕시코 정부는 아리스타를 소환하여 사령관직을 박탈했다. 이후 아리스타는 팔로 알토와 레사카 드 라 팔마에서의 패배에 대한 사면을 받았지만, 전투에서 배제되어 나머지 전쟁을 지켜봐야 했다.

1851년 아리스타는 대통령으로 호세 호아킨 데 에레라의 뒤를 이어 국가에 안정된 재정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리스타 정권에 대한 보수파의 저항과 그들에 의한 마지막 반란은 1853년에 그를 사퇴와 추방으로 이끌었다.

1855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사망한 아리스타의 시신은 1880년 멕시코로 돌아왔으며, 진보 계파들은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여겼다.

참조

[1] 웹사이트 Mariano Arista https://libraries.ut[...] 2024-08-28
[2] 서적 El Verdadero Diaz 1920
[3] 웹사이트 Arista, Mariano https://tshaonline.o[...] Texas State Historical Association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